화이트데이 이야기 #4 - 기획: 적(敵)의 존재 화이트데이 제작기

1년만에 뜬금없이 또 포스팅... ㄱ-
이 글은 회고록의 성격을 띄고 있으므로 경어를 쓰지 않겠습니다.



99년 중반, 프로젝트가 진행된지 1년이 지났을 때
예정대로라면 이미 게임이 완성되었어야 할 때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몇 가지 이유는 다음과 같았다.

(1) 무엇보다도, 우리 모두가 너무 초짜였다.
   경험부족으로 스스로의 역량, 가능한 기술, 목표의 크기에 대한 견적을 제대로 낼 수 없었던 것.

(2) 처음 해보는 풀 3D 게임 개발은 2D 게임 개발보다 2/3배가 아니라 3배는 어렵더라. 
   (가브리엘 나이트3 포스트모템에서 인용)

(3) 기본 컨셉은 좋으나 이후의 기획이 미정상태다. 

(4) 다른 프로젝트로 인해 멤버들 모두가 여력이 없었다. 
   여름에는 선행 프로젝트인 강철제국의 마무리를 위해 거의 전 직원이 투입되었다. 
   화이트데이 역시 스톱 상태.


이렇게 방치된 상태로 가을에 접어들자 회사에서는 사태의 심각성을 느끼고
프로젝트에 몇 가지 결정을 내렸다. 이 때부터 나는 어설프게나마 일했던 프로그래머
일을 접었고, 본격적인 디렉터로서 일을 시작했으며 기획의 전권도 갖게 되었다.

나로서는 재미있고 애착이 많이 가는 프로젝트였기에
개발과 기획의 최고책임을 맡은 것이 무척 기뻤고 의욕적으로 일을 재개할 수 있었다.

전에도 설명했듯 호러로 시작해서 미지근하게 끝나버린 부끄러운 게임 하나를
아르바이트로 일했던 적이 있었기 때문에, 이번에는 제대로 된 호러게임을 만들어보이고 싶었다.



그때까지 잡혀있던 게임의 기본 컨셉들 -
학교가 배경이며, 1인칭 시점이고, 공격이 불가능하다(슈팅이 아니다)
는 점은 훌륭했다. 하지만 나머지 것들은 많이 바뀔 필요가 있었다.

그때는 지금보다 아는게 없어서인지 애송이가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참 과감했던 것 같다.
게다가 얼마나 무섭게 만들수 있는지 상업게임이 갈 수 있는 한계까지 해보자 라는 오기도 있었다.
우선은 게임의 세계관을 정립하고 게임플레이를 명확하게 정의하는데서부터 착수했다.



플레이어가 맞닥뜨리는 적은 누구인가?
이전에 설정된 스토리는 미치광이 살인마가 학교를 돌아다닌다는 것이었는데..
이게 별로 무섭단 생각이 안 들었다. 호러영화 동호회의 철야상영회를 보러
돌아다니면서도 느꼈던 것인데, 할리웃 영화들이 '호러=고어' 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마음에 안들었다. 피칠갑이 끔찍한 것은 생물이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 신체의 손괴를 두려워하는 본능과 관련이 있다. 하지만 이게 진정한 공포일까?

전설의 고향이나 80년대 소년지를 보고자란 나로서는 살인마나 흑마술보다는,
귀신이나 심령현상쪽이 훨씬 더 익숙하고 무서웠다. 참고로 봤던 많은 호러영화들
중에서는 링과 샤이닝 같은 영화에 주목하였다. 링은 볼 때는 별로 안 무서웠는데
보고나서 가끔 꿈에 나타나 괴롭곤 했다. 피 한방울 안 나오지만 이렇게 무섭다니!
역시 링처럼 흰옷입은 긴머리 귀신이 나오는게 더 무섭다고 생각했다.

내 자신이 납득 안가는 공포를 강요하는 것보다는, 내가 알고 있는 가장 무서운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게임도중 이벤트 씬에는 링에 바치는 오마쥬가 나오기도 한다.


또 다른 적은 수위. 화이트데이를 해본 플레이어들이 가장 치를 떨었던 일등공신이다.
초기 시나리오에서 수위는 필요할때 이벤트로 등장하는 악역 정도였는데,
이 녀석을 단순 이벤트가 아니라 리얼타임으로 돌아다니게 하면 훨씬 재미있고 긴장감이 있을거라고 생각했다.
수위는 교내 복도의 정해진 루트를 순환해서 순찰하고, 플레이어를 발견하면 무자비하게 공격한다.

프로토타이핑은 언제나 중요하다. 
몇 년 걸려 만들어놓고 봤더니 재미없으면 우울한 상황이 된다.
코스트가 많이 들어가는 핵심 피처는 만들기 전에 테스트나 샘플로 확인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

루트 순환이라는 요소는, 사실은 굉장히 오래된 고전게임을 통해 재밌겠단 확신을 얻었다.
85년쯤 MSX에 나왔던 '미드나잇 브라더스'라는 탐정 어드벤처 게임.
플레이어는 한밤의 건물에 잠입해서 단서를 찾는데, 이 건물의 미로같은 내부중
최외곽은 하얀색 스프라이트로 된 적이 단순히 뺑뺑이 돌고 있다.
옛날 이 게임이 생각나서 참고해보려고 사무실에서 에뮬레이터를 띄웠는데,
복도를 움직이다가 적을 맞닥뜨리고서는 가슴이 내려앉는줄 알았다.
이 정도면 됐다. 소리조차 꺼놓았는데 이렇게 긴장감 있다니. 하는 확신을 얻었다.


화이트데이에서 수위는 순찰중 이상한 소리나 '교내 이상 상황'을 발견하면 가서
주변을 살피고, 별다른 단서를 못 찾으면 이상상황을 정상화하고 순찰을 계속한다.

'교내 이상 상황'이라는 것은 교실에 불이 켜있다든가, 문이 열려있다든가
하는 것을 이야기한다. 이에 대한 아이디어는 당시에 실제로 학교를 무단침입(?)한 체험에서 얻은 것이다.

학교의 자료를 얻기 위해서 전 팀원들과 카메라를 들고 회사 근처 학교를 들른적이
몇 번 있었는데 한 번은 일부러 어두운 저녁시간에 들어갔다. 그러던 중에
수위아저씨인지 공사인부들인지 교내에 남아있던 사람이 계단을 올라오는 소리가
나서 다들 화장실에 숨었는데, 소리가 들릴까봐 차마 문을 닫지 못하고 복도를
바라보고 있었다. 열린 문 앞으로 지나가는 걸 보면서 얼마나 조마조마하던지...

'소리를 내거나 흔적(문, 불)을 남기면 위험하다' vs.
'그러나 흔적을 치우는 것(문닫기) 역시 소리가 나서 위험하다'
라는 딜레마는 여기서 만들어진 것이다.
적절한 딜레마(갈등상황)는 플레이에 긴장과 재미를 부여한다.

또다른 딜레마는 '복도는 수위가 돌아다니니 위험하다' vs. '이동을 위해서는 복도로 다녀야한다'는 것이 있겠다.



수위 외의 또 다른 적으로는 머리귀신이라는 것이 있다.
기억하는 분들 있겠지만 이 귀신 생김새는 정말 포쓰가 너무 강렬하다.
인터넷에 돌아다니던 사진을 원본으로 한 것인데, 어느날 밤샘작업을 하다가
재미삼아 머리만 잘라다가 빌보드로 만들고 게임에 넣어보았다.
다음날 아침에 관희님이 실행해보고 사무실에서 비명을 지르며 자리에서 쓰러졌는데
괴롭힐 의도는 아니었지만 그 반응을 보고 "됐다!"라는 생각을 했다. :)

스탭중 일부는 혹시 진짜 심령사진 아니냐, 찝찝하니 쓰지 말자는 입장이었지만
내가 보기엔 좌우로 빨강 파랑 색수차 같은게 있는걸로 보아 연출된 입체안경 영상인게 명백했다.

어쨌든 저작권 문제로 이 사진을 쓸 수는 없으므로 디자이너에게 부탁해서
이것을 참고해 무서운 귀신 이미지를 만들어달라고 했는데, 아무리 해봐도
원본처럼 강렬한 이미지가 나오지 않았다.
결국은 원본사진을 쓰기로 하고, 사진의 출처인 출판사를 어렵게 수소문해서
게임에 삽입해도 좋다는 허가를 받게 되었다.


그런데 이 머리귀신은 움직이는 방식이 더 무섭다.
머리귀신은 배경에 대해서 전혀 충돌처리를 하지 않으며 (즉 벽이나 바닥을 뚫고 다니며)
무조건 플레이어를 향해서, 매우 느리게 다가온다. 1초에 10cm 정도...
그리고 정면으로 보았을때 거의 보이지 않는다. 화면 가장자리쪽에 있을수록 잘 보인다.

점점 쇠꼬챙이로 벽을 긁는듯한 기분나쁜 소리가 다가오길래 주변을 살피다가
무섭게 생긴 여자머리가 떠있는걸 화면주변부에서 발견하는 것만으로도 무서운데,
가만 보고 있으면 아주 천천히 다가오고 있다.....
라는 악랄한(?) 구성이 머리귀신을 플레이어들이 잊지못하는 악몽같은 존재로 만들었다.

이 움직임 방식을 게임중의 책을 통해 플레이어들에게 알려줬다면 더 좋았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다. 내가 한 곳에 머무르지 못하도록 조여오는 존재가 월드에 있다는 걸 아는게 더 긴장되니까.

이 녀석의 본질은 사실 보글보글에 나오는 보라색 고래모양의 캐릭터와 같다.
한곳에서 시간끌고 있으면 나를 응징하러 다가오는 것이다.


그런데 뒤늦게 생각해보면, 데모버전에는 머리귀신을 넣지 않는게 좋았을 것이다.
데모버전 해보고 너무 무서워서 안 샀어요. 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사실 머리귀신은 본관(첫 건물)에만 등장하고 후반에는 나오지 않는다.
게임 후반부가 오히려 덜 무서운 셈인데, 데모버전이 지레 겁을 먹고 나가떨어지게 해서
게임의 상업성을 떨어뜨렸다고 반성한다.

호러게임은 공포, 재미, 상업성 이 3가지 요소의 밸런스가 중요하다.
당시에도 그런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화이트데이 별 거 아니다,
바이오해저드나 유작 베껴만들었을 것이다"는 게이머들의 폄하성 예측에
오기가 발동해서 오버하는 실수를 범했다. 데모버전은 수위만으로도 충분했을 것이다.



아... 뜬금없이 생각이 들어 글을 썼더니 새벽이 밝았다.

차회 예고 (시기는 미정) :
  거장의 음악
  기획: 캐릭터 설정
  미궁의 메타포

덧글

  • 2006/07/02 13:03 #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06/07/02 16:23 # 삭제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5z 2006/07/06 19:12 # 삭제

    비공개 덧글입니다.

    헉, 글 쓴 시간이 새벽 5:20이네요. ;;
  • aqualix 2006/07/07 12:21 # 삭제

    글 잘 보고 갑니다~ 개발자로서 이런 글은 언제나 도움이 되네요~
  • 항해자D 2006/07/08 14:41 #

    훈마// 요즘 소식 통 못 듣고 있었는데 반갑다! 미국땅 생활 재밌나 모르겠다. 재밌었던 고등학교 시절이야말로 귀중한 체험이었지 :)

    gim// 고쳤음~

    5z// 지난주 내내 피곤;

    aqualix// 방문 감사합니다~
  • 2006/07/11 16:02 #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서린언니 2006/07/22 11:41 #

    안녕하세요. 이은석님 맞으시죠?
    우진님 블로그 타고 들어왔습니다.

    아 이런얘기 이제 지겨우시겠지만서도 ^^;
    얼마전에 클래식 펜티엄과 사블 32를 친구에게 입수해서
    불기둥을 다시 돌려봤습니다. 놀랍게도 아주 잘 돌아가더군요.
    그래서 집에오면 틈틈히 한두판 합니다.
    (전처럼 잘은 못하겠더라구요. 오랜만에 하니 엄청 어렵네요)

    벌써 발매된지 10년이 넘었군요.

    화이트데이는 인증번호 잊어먹어서 dvd로 고이 모셔두고있지요.
    매트록스 g400다운버그때문에 골치를 썩였지만 정말 재미있게 했지요.

    그럼 좋은하루 되시고 안녕히계세요.

    -ps 아참.. 링크했습니다. ;;
    동건님과 이원님께도 안부전해주세요.
    언젠가 불기둥을 TV애니메이션으로 만들고싶다고 전해주세요 T_T
  • 블루멘탈 2006/08/03 14:24 #

    이은석씨 안녕하세요~이글루 하셨었군요~링크했습니다.
  • 항해자D 2006/08/16 07:57 #

    서린언니, 블루멘탈// 반갑습니다~ :)
  • 항해자D 2006/08/16 07:59 #

    Izzmo// 죄송하지만 msn 메신저를 요즘 거의 쓰지 않고 있습니다.. (너무 늦은 답변이네요;)
  • 茴香 2007/07/04 22:23 #

    뜬금없이 죄송합니다만 너무 반가워요!!
    화이트데이 정품 박스 게임을 뒤늦게 찾느라 검색하다 들어왔습니다.

    그 머리 귀신 낯이 익더라니만;; 역시 "쉿!!"에 나온 그녀로군요!! 입체귀신 이야기인가 뭔가;;

    당시에 악튜 예약해서 초판 데모도 받았었지만, 컴퓨터가 P1이라 올해 돌려봤습니다. 화이트데이는 패키지의 로망으로 구매해서(나오자 마자 예약했지만;) 올해 돌려봤습니다. 저에겐 너무 어려운 게임이라...번들에 포함되었다는 일명 '콘솔'을 다운 받지 못했으면 아마 틀고 나서 수위가 등장하면 esc를 누르는 바보짓을 반복했을겁니다;;;

    반가워서 링크 추가 하고 가요!
  • 버금 2013/02/22 03:11 #

    머리 귀신 하나 때문에 데모 버전임에도 게임이 극도로 무서워져서 안사는 사람이 발생해서

    상업성 밸런스가 무너져버리다니...
※ 로그인 사용자만 덧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


링크